☆ 에린에 오기 전
이전 세상의 그녀는 영국에 살던 '에트왈 블랑'이라는 이름의 나름 명망있는 집안 출신의 유명한 발레리나였다.
(어째서 이름이 프랑스식이냐면 조상이 프랑스 출신이 맞기 때문. 영국으로 이주한 뒤 자리를 잡아 상류층 진입에 성공했다나...)
부모가 꽤나 고압적인 성격이었던 탓일까, 어릴 때 부터 하라는 대로만 움직이는 실에 묶인 인형과도 같은 수동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교통 사고에 휘말려 코마상태에 빠진 채로 영혼만이 소울스트림으로 흘러가 에린에 당도하게 되었다.
★ 에린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오의 인도를 받아 에린에 처음 발을 들인 열살 남짓의 모습을 한 어린 소녀는 정말 말 그대로 인형이 따로 없었다.
무구히도 아름다웠으나, 웃지도 울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에트왈' 이라는 이름 외의 기억이 없던 것도 있었으나,
전생의 그녀가 정말 말 그대로 인형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에린에 발을 들이게 된 것 까진 좋았으나, 모종의 알 수 없는 이유로 불시착하여 시드 스넷타에 발을 들인 상태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굶주린 코요테 무리에게 공격당해 숨이 한 번 끊어졌었다.(원래 세상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도 이 순간)
다시 숨이 돌아와 정신을 차렸을 땐 웬 오두막 안이었고, 그 안에서 '베라' 라는 이름의 여성과 만나게 되었다.
"쓰러져 있길래 데려왔다" 라고 말하기에 감사를 표했고, 이상하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던 소녀는 여인과 함께 설원 속의 오두막에서 지내기로 했다. '베라'는 소녀를 「아가」라고 부르며 마치 딸처럼 대했다.
그렇게 '베라'의 '순종적이고 사랑스러운 딸'로서 약 다섯 달을 평화롭게 보내던 어느날, 소녀는 돌연 자신을 이 세계로 인도해준 흰 머리카락에 검은 옷을 차려입은 누군가를 떠올렸고, 소녀는 늦게나마 가방 속의 편지를 산 아래 마을의 촌장에게 전해주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일과를 마치고 늘 그러하듯 자연스레 집으로 돌아왔으나, 언제나 처럼 자신을 반겨주던 '베라'는 홀연히 사라져 있었다. 생각해보니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꼭 무언가에 홀렸었던 것 마냥.
조금은 허전한 기분이 들었으나,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내일은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볼까? 같은 생각을 하며 혼자 남은 방에서 잠에 빠져들었다.
잠깐의 눈보라에 가려졌던 별의 여행자로서의 파란만장한 삶이 이제서야 시작된 것이다.
감정을 드러낼 줄 몰랐던 소녀는, 이 상냥하면서도 잔혹한 낙원에서 그렇게 조금씩 감정을 배워갔다.
ps. 지금 살고있는 집은 '베라'와 살던 오두막이 있던 터가 맞다. 지내던 곳을 딱히 버릴 맘은 들지 않았다. 결계로 숨겨진 이 장소가 편안했고, 어떻게 해야 찾아 들어갈 수 있는지 알고 있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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